韓国語で韓国史学の論文を読んでみる-6-
여호규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주목하였다.
여호규は高句麗の対外関係に注目した。
그는 영락 5년의 패려 정벌을천하관의 공간 범위가 설정된 것으로 보았다.
彼は永楽5年の稗麗征伐を天下観の空間範囲が設定されたものと考えた。
윤상열은 천하관을 구성하는사상적 배경의 하나로 고구려의 천손 의식에 주목했다.
윤상열は天下観を構成する思想的背景の一つとして高句麗の天孫意識に注目した。
이는 천하관이 4~5세기에 갑작스레 등장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부터 존재하였던 동북아 일대 국가들의 천손국 의식이 고조선→부여→고구려로 계승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これは天下観が4〜5世紀に突然登場したのではなく、紀元前から存在していた北東アジア一帯の国家の天孫国意識が古朝鮮→扶余→高句麗へと受け継がれていること指摘したものである。
또 천손 의식·신성관념·복속관념이 결합하여 천하관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의 천하관이 4~5세기 유·불교의 수용을 기점으로 再造된 것으로 보았다.
また、天孫意識・神聖観念・服属観念が結合して天下観になったと主張し、高句麗の天下観が4〜5世紀、儒教・仏教の受け入れを起点に再造されたものであると考えた。
여러 선행 연구에서 지적하였듯 고구려의 천하관은 국초부터 있었던 고구려 왕실의 천손 의식이 5세기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거치면서 대두된 개념이었다.
複数の先行研究で指摘されたように、高句麗の天下観は国初からあった高句麗王室の天孫意識が5世紀に広開土王の征服活動を経て、台頭した概念であった。
다만, 고구려의 천하관이 적용되었던 공간적 측면에 대한 언급은 적은 편이다.
ただし、高句麗の天下観が適用された空間的側面の言及は少ない。
그 이유로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광개토왕릉비」, 「牟頭婁墓誌銘」, 「忠州高句麗碑」등 금석문 자료에 한정되기때문이었다.
その理由としては、高句麗の天下観を把握できる史料が「広開土王陵碑」、「牟頭婁墓誌銘」、「忠州高句麗碑」など金石文の資料に限定されるからであった。
다른 이유로는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적 문제점을 들 수 있다.
他の理由としては、「広開土王陵碑」の内容的な問題点を挙げている。
「광개토왕릉비」에는 稗麗·백제·肅愼·신라·왜·伽耶·東扶餘까지 고구려 주변의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등장한다.
「広開土王陵碑」には、稗麗・百済・肅愼・新羅・倭・伽耶・東扶餘まで高句麗周辺のすべての国と種族が登場する。
그들은 자발적으로 고구려에 복속하거나, 고구려의 질서를 위반해 정토의 대상이 된다.
彼らは自発的に高句麗に服属したり、高句麗の秩序に違反して征討の対象となる。
그러나 후연은 유일하게「광개토왕릉비」상에서 그 실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しかし、後燕は唯一「広開土王陵碑」で、その実体が全く現れない。
광개토왕은 요동을 두고 후연과 각축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구려는 멸망 때까지 요동에
굳건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広開土王は遼東を置いて後燕と競り合いを繰り広げ、この戦争で勝利して、高句麗は滅亡するまで遼東に堅固な支配力を行使することができた。
「광개토왕릉비」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업적임에도, 후연의 서술이 없다는것은 광개토왕의 요동 진출이라는 업적이 퇴색될 수 있는 문제다.
「広開土王陵碑」で大きく注目すべき業績にも、後燕の叙述がないということは広開土王の遼東進出という偉業が色褪せる可能性がある問題である。
고구려의천하관은 4~5세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하였다기보다는 고구려의 역사적 경험이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통해 현실 공간에 대두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高句麗の天下観は4〜5世紀に急に登場したというよりは、高句麗の歴史的経験が広開土王の征服活動を通じて現実空間に台頭したもの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
이전에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이 새롭게 편입되었다는 것은 천하관의공간 구성 역시도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다고 여겨진다.
以前に高句麗の領土ではなかった地域が新たに編入されたことは、天下観の空間構成もやはり影響を受けて変化したと思われる。
이에 본고에서는 광개토왕의 영토확장이 고구려 천하관의 공간적 토대와연결되는 것에 주목하려고 한다.
ゆえに本稿では、広開土王の領土拡張が高句麗天下観の空間的基盤と接続されていることに注目して考えていく。
2장에서는 광개토왕 집권기 진행되었던 정복활동에 대해 정리하겠다.
2章では、広開土王執権期に進行された征服活動についてまとめたい。
고구려와 백제, 왜의 전쟁을 통해 고구려가 한반도일대로 진출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高句麗と百済は、倭の戦争を介して、高句麗が韓半島一帯に進出する過程を調べるものである。
또, 후연과 전쟁을 벌이면서 요동이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을 짚어보겠다.
また、後燕と戦争をしながら遼東が高句麗の領土に編入される過程を探ってみよう。
광개토왕이 획득한 영토들은「광개토왕릉비」에서 등장한 고구려인의 천하관의 공간 인식과도 결부되기 때문에,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
広開土王が獲得した領土は「広開土王陵碑」で登場した高句麗人の天下観の空間認識とも結びつくために、まず、整理する必要がある。
3장에서는 「광개토왕릉비」의 주변국 인식에 대해 알아보겠다.
第3章では「広開土王陵碑」の周辺国認識について調べる。
광개토왕의전공은 고구려가 자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을 드러내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広開土王の戦功は高句麗が、自国が天下の中心であるという天下観を露にする直接的原因となった。
이를 토대로 고구려는 백제, 신라, 동부여 등을 자국에 복속된 존재로 파악하였다.
これを土台に高句麗は百済、新羅、東夫餘などを自国に服属された存在で把握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