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語で韓国史学の論文を読んでみる-3-
・訳文は韓国語の勉強を6年程度しかしていない者の試作的なものであり、間違いがあることを前提にして読んでください。間違いを指摘していただければありがたいと思います。漢字表記は旧漢字も新漢字も区別しないで用いています。
이는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에 기인한다.
これは高句麗と東扶餘の関係に起因する。
점차 고구려는 동부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은 시조 주몽의 출자를 북부여 시조 解慕漱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꾸며, 동부여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徐々に高句麗は東扶餘との競争で優位を占めたが、高句麗人は始祖朱蒙の出自を北扶餘の始祖解慕漱から始まったということに仕立てあげ、東扶余に対して優位を占めたいと思った。
그리하여 東明聖王→瑠璃明王→大武神王으로 이어지는 건국 초세왕의 부여에 대 한 항쟁이 「광개토왕릉비」에서 ‘동부여는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는 수사적 표현으로 선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そうして東明聖王→瑠璃明王→大武神王につながる建国始祖王の扶餘に対する抗争が「広開土王陵碑」で「東扶餘は朱蒙王の時から属民だった」は修辞的表現で宣言されたものと思われる。
肅愼은 梁貊과 더불어 3세기 중반 고구려의 간접지배를 받았던 종족이었다.
肅愼は梁貊とともに、3世紀半ば高句麗の間接支配を受けた種族であった。
이들은 원래 부여에 복속되었다가 3세기 이후 부여가 고구려와 전연의 침공을 받아 약해지자 부여의 지배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これらは元々、扶餘に服属していたが、3世紀以降の扶餘が高句麗と전연の侵攻を受けて、弱くなると扶餘の支配から離脱し始めた。
그러나 4세기 전반 고구려가 길림 일대를 장악하면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しかし、4世紀前半高句麗が吉林一帯を掌握しつつ、独自の国家を形成する段階まで至ることはなかった。
고구려는 자국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억세기까지 한 숙신을 굳이 복속시키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숙신 간의 교역은 5세기까지 ‘沈默交易(Silent Trade)’의 형태로 행해졌다. 다만 고구려는 숙신도 자국에 복속 된 존재로 인식했다.
高句麗は自国と使用する言語が違い、頑なに拒んだ肅愼をあえて服属させなかったし、高句麗と肅愼間交易は5世紀まで「沈默交易(Silent Trade)」の形で行われた。ただし、高句麗は肅愼も自国に服属された存在として認識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