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성」에 대한 메모

2022.10.08.sat
특별히 흥미로운 한 가지 특질이 더 있다. 그녀의 중성성 말이다. 대체로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마주침과 견뎌냄의 과정에 어떤 성별 논리도 개입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특별히 겪게 되는 마주침은 없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정념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슬픔은 중성적이고 그 슬픔의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그녀의 명랑성을 만든다. 아니, 명랑성이란 본질적으로 중성성인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그녀의 화자들을 ‘소녀’라 부른다 해도 이것은 작품 내적 성별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계간 문학동네 2006년 겨울호 통권 49호, 신형철]

남녀 성차의 이분법적 틀에 대한 재고는 이미 낡은 것이라고는 하나, 학계에서 한 발짝만 떨어져 보아도 여전히 그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2년의 4/4분기에 들어선 현 시점에도 시스젠더들은 배짱이 좋고, 트랜스젠더들은 (성)폭력을 당하고, 우리의 여성들은 남성들의 언어로 남성들을 설득해 주기를, 부디 그렇게 멍청해주기를 강요당한다. 길을 지나다 마주치는 풀잎 하나에도 기어코 이름을 붙여야겠는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호명'하고 싶다는 욕구 만큼은 곧 죽어도 포기가 안 되는 모양이다. 남성도 아닌 것 같고, 여자도 아닌 것 같은 이를 마주쳤다면 그냥 그런 이로 살게 두면 될 것을, 구태여 우리는 그를 중성적인 사람이라며 거짓 치켜세우기를 하지 않는가. 그것은 젠더적 관점에서 보면 일견 배려이나, 호명의 문제로 옮겨 왔을 땐, 그 사정이 달라진다. 이름을 붙이는 일에는 분명 권력의 작용이 따른다는 사실을 동의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의 이름이 반드시 부모로부터 하사받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음 대(代)의 아이로부터 이름을 받는 성인은 없을 것이다. 동식물의 명칭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특징, 습성, 분류종에 따라 이름을 부여 받는다. 혹은 선점 당한다. 이게 무엇이 문제이냐고 묻거든, 나는 그렇게 두둔하고 싶어지기까지 하는 그 편리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김애란/김애란의 작품 을 두고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특별히 겪게 되는 마주침은 없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정념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슬픔은 중성적이고 그 슬픔의 처리 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그녀의 명랑성을 만든다.]라고 말한다. 정말일까? 비신뢰적인 서술화자가 손톱 끝의 티클과 거대 소비라는 소재를 가져와 우리를 쓸쓸하게 만들던 소설(「큐티클」)이나,  부권이라고는 찾아 볼 수 가 없어 역으로 충격을 안겨주었던 소설(『달려라, 아비』)을 써온 김애란이 정말로 중성적인 것일까? 혹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간(성)에 말하기를 교묘하게 피하고자 당신에게 편리한 곳에 차치해두는 것은 아닐까? 물론 위의 평은 16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당시에도 여전한 격동을 겪고 있던 사회적 배경을 감안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재고까지 가 닿기엔 그마저도 대단한 배려였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다만, 중성적이라는 것을 어떤 변증법적 대안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어쩐지 어느 지배적이었던 성(性)이 단 한 번도 그에 대한 대립항까지 되어본 적이 없는 또 하나의 성을 배척하는 새로운 우회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이너리티, 그 안에서 메이져리티가 되어버린 여성에 대한 호통을 왜 남성들이 중성의 목소리를 빌어 치려는 것이냐는 말이다. 슬픔의 처리 과정이 중성적이라니.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 그러니까 여성의 목소리에 감응했다면, 그냥 그가 그 순간 여성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중성]이 둘 다인지, 둘 다 아닌 것인지, 혹은 둘이 아닌 셋, 넷, N개의 다양성 혹은 교차성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그 존재 만큼이나 복잡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중성적}이라고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그것의 양 극단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고, 마치 이항대립에 대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시선을 가진듯 착각 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중성이라고 호명하기로 한 순간, 그는 이방인이자 타자, 배제되고 이해불능인 자, 그러나 우리가 원할 때엔 언제든 허울 좋은 변명이 되어주어야 할 자가 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중성은 누구나 쉽게 자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여성임을 자칭할 수 있기 까지, 그리고 한편 남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분노를 어렵게 목격해야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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