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語で韓国史学の論文を読んでみる-9-

「광개토왕릉비」에서 획득한 성들의 이름을 세세히 기록한 것을 보아 396년 전투의 성과가 왕의 업적 중에서도 특별하게 여겨진 것 같다.
「広開土王陵碑」で獲得した城の名前を細かく記録した事を見れば396年の戦いの成果が王の業績の中でも特別であると思われる。

「광개토왕풍비」에서는 58성을 획득한 순서대로 기록하였는데,이 성들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 분포하였다고 한다.
「広開土王陵碑」では58城を獲得した順に記録したが、これらの城はかなり広い地域に分布したと思われる。

고구려는 황해도 일대에 대규모의 산성들을축조하고,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주요 교통로 주변의 군사적 요충지에 대한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高句麗は黄海道一帯に大規模な山城を築造し、有機的に接続して主要な交通機関周辺の軍事的要衝の支配を確固にした。

아신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수복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阿莘王は高句麗に奪われた土地を回復しようとする努力を継続した。

아신왕은왕자腆支를 왜에 質로 보냈고,왜 왕실은 백제의 청병을 받아들여 원군을파병하였다.
阿莘王は王子腆支を倭へ質として送り、倭王室は百済の請兵を受け入れ、援軍を派兵した。

아래의 기사들은 「광개토왕릉비」에서 고구려의 대왜전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下の記事は「広開土王碑」で高句麗の対倭全記事をまとめたものである。

가-11. 백잔과 신라는 예부터 (우리나라의) 屬民이었다.
가-11.百残と新羅は昔から(高句麗の)屬民であった。

때문에 조공해왔다.
それゆえ、朝貢してきた。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깨뜨리 고 臣民으로 삼았다.
そして倭が辛卯年に海を渡って来て百残、□□、新羅を破って臣民とした。

가-12. 9년 기해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더불어 화통하였다.
가-12. 9年己亥に百残が盟誓を破って倭と和通した。

왕이平穰을 巡幸하려 내려가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수도의 땅에 가득해 성과 해자를 부수고 노객을 민으로 삼으려 합니다. 왕께 귀의하여 목숨을 청하고자 합니다.”하였다.
王が平穰から巡下すると、新羅が使者を送って申し上げたことは「倭人が首都の地に満ちて城と堀を壊し老客(古くからの臣民)を民にしようとしています。王に帰依し命令にしたがいたいと思います」と言った。

태왕께서는 은혜와 자비로 그 충성을 가엾게 여겨 □사신을 보내 □계책을 알리게 하였다.
太王は恵みと慈悲からその忠誠を哀れに思い□使者を送って□計略を発表した。

가-13. 10년 경자에 敎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해 신라를 구원하고 오게 했다.
가-13. 10年庚子に敎を下し歩兵と騎兵5万を派遣して新羅を救援してくるようにした。

男居城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 곳에 왜가 가득하였다.
男居城を経て、新羅城に到着するとそこには倭が満ちていた。

官軍이 막 이르자 왜적이 도망갔다.
官軍が到着するとまさに倭敵が逃げていった。

□□뒤를 급히 쫓아 任那加羅의 從拔城에 다다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後を急いで追いかけ任那加羅の從拔城にたどり着くと城がすぐに降伏した。

安羅人戍兵 신라성□성□倭寇가 크게 무너지니 성 안의 대부분은 다 왜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였
다.
安羅人戍兵 新羅城□城□倭寇が大きく崩れ、城中の大部分はみな倭に従うことを拒否した。

안라인수병이 (중략) 무너져 역시 안라인수병에게 따라가 □하게 했다.
安羅人戍兵が(中略)崩れ、やはり安羅人戍兵に付き従って□にした。

이전에는 신라의 매금이 몸소 와서 논사**한 적이 없었다.
以前は、新羅の寐錦が自ら来て事を論じた(命令に従った)ことがなかった。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매금이 □하여 조공하였다.
□□□□広開土境好太王に至って寐錦が□で朝貢した。

가-14. 14년 갑진에 왜가 질서를 어기고 帶方界에 침입했다.
가-14. 14年庚申に倭が秩序を破り帶方界に侵入した。

잔국과 화통하고 석성에 이르러 □했다. 連船해 □□□ 왕이 몸소 □□을 이끌어 평양을 거쳐 □鋒과 마주쳤다. 

残国と和通し石城に達し□した。連船して□□□王が自ら□□を引き出し、平壌を経て□鋒と合った。

근왕병(王幢)이 요충지를 끊고 찔러 씻어버리니 왜구가 크게 무너져 패하였다.
大きい王軍(王幢は軍旗)が要衝を遮断し、待ち受けて切っておおいに刺したので倭寇は大きく崩れ敗れた。

베어 죽인 것이 무수히 많았다.
斬り殺しが無数に多かった。

가-15. 17년 정미에 교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하였다.
가-15. 17年丁未に教を下して歩兵と騎兵5万を送り□した。

(우리) 군사가 □□하여 합전해 베어 죽이고 전부 쓸어버렸다.
(我)軍士が□□して、合戦し斬り殺しすべて一掃してしまった。

노획한 개갑이 1만여 벌, 군자와 병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捕獲した鎧甲が1万余領(セット)、軍士と兵器は数え切れないほど多かった。

돌아오면서 沙溝城,婁城, □□城, □城, □□□□□□城을 쳐 깨뜨렸다.
帰還しながら、沙溝城、婁城、□□城、□城、□□□□□□城を打ち破った。

위 사료는 「광개토왕릉비」의 왜와 관련된 기사이다.
上記資料は「広開土王陵碑」の倭の関連記事である。

가-11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는데,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온 왜가신민으로 삼았다고 한다.
가-11では百済と□□、新羅は元高句麗の属民であったが、辛卯年(391)に海を渡ってきた倭が臣民にしたとする。

광개토왕 9년(399) 광개토왕은 백제가 광개토왕 6년(396)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직접 평양으로 행차하였는데, 왜의 공격을 받고 있던 신라가 도움을 청해 왔다.
広開土王9年(399)広開土王は百済が広開土王6年(396)の誓いを破って、倭と和通したことに対して報復するために直接平壌にお出ましされたが、倭の攻撃を受けていた新羅が助けを求めてきた。

이듬해 광개토왕은 보기 5만을 신라로 파견하였다.
翌年広開土王は 보기5万を新羅に派遣した。

광개토왕 10년(400) 고구려의 ‘官軍’은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렀다.
広開土王10年(400)高句麗の「官軍」は男居城を経て新羅城に至った。

왜군이 도망치자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추격하여 궤멸시켰다.
倭軍が逃げようと任那加羅の從拔城まで追撃して壊滅させた。

한반도 북부에서 경주로 가는 경로는 竹嶺 또는 鷄立嶺을 넘거나, 동해안 해안도로를 따라내려오는 경로가 있다.
韓半島北部から慶州へいく経路は、竹嶺または鷄立嶺を超えたり、東海岸海岸道路に沿って下ってくる道がある。

죽령은 가장 단거리지만, 산세가 험준하여 매우 불편하다.
竹嶺は最も短距離であるが、山の地形が険しくて非常に不便である。

당시는 수도가 포위된 상황이었으므로, 고구려의 군 편성에서 기동력을살릴 수 있는 기병이 병력 구성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当時は首都が包囲された状況だったので、高句麗の軍編成で機動力を生かすことができる騎兵が兵力構成の大幅な割合を占めたのである。

고구려군의 이동로는 풍기→영주→안동→의성→군위→칠곡→영천을 거치는 루트나, 동해안을 따라 강릉→삼척→울진→영덕→안강을 통해 이동하는 두 경로로좁힐 수 있겠다.
高句麗軍の移動には、풍기→영주→安東→의城→軍威**→漆谷→霊泉を経るルートや、東海岸に沿って江陵→三陟→蔚珍→盈徳→安康を介して移動する二経路に絞り込むことができる。

광개토왕 10년의 군사활동은 단순히 신라를 구원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広開土王10年の軍事活動は、単に新羅を救援しようとする目的だけではなかった。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군을 격퇴하면서, 신라는 고구려에 군사적·정치적으로 크게 예속되었다.
高句麗の助けを借りて倭軍を撃退した新羅は高句麗に軍事的・政治的に大きく隷属された。

412년에는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고,417년에는 신라의 왕위계승에 고구려가 노골적으로 관여하였다라의 상황은고구려에 크게 예속된 신라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412年には卜好を高句麗に人質に送り、417年には新羅の王位承継に高句麗が露骨に関与したという状況は、高句麗に大きく隷属された新羅の状況を反映しているものである。

한편 가-13에는 ‘安羅人戌兵’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一方가-13には「安羅人戌兵」という存在が登場する。

이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연구를 제시하였다.
これらの性格に対しては、研究者が各自異なる研究を提示した。

먼저 ‘안라인수병’을咸安에 있던 安羅國의 병사들로 보아 왜의 별동대,백제의 지원군으로 보기도한다.
まず「安羅人戌兵」を咸安にあった安羅國の兵士たちとみて、倭の別働隊、百済の援軍とみる。

또 다른 의견으로는 安을 동사로 보고,‘두다’로 해석해 신라인이나고구려인들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다.
別の意見では、安を動詞と見て、「置き」と解釈し新羅人や高句麗人をおいたものとみる。
 
「광개토왕릉비」 의 전쟁기록은 반드시 모종의 이유를 들어 고구려가 정토에 나서고, 전투 이후에는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끝난다.
「広開土王碑」の戦争の記録は必ずある種の理由を挙げ、高句麗が征討に乗り出し、戦闘以後には後続処置が行われて終わる。

안라인수병을 ‘안라인의 수병’ 으로 해석하던지,‘신라인 수병을 배치한 것’으로 해석하던지, 모두 전후 처리에 고구려의 의도가강하게 반영된 사건이었을 것이다.
安羅人戌兵を「安羅人の戌兵」と解釈するか、「新羅人戌兵を配置したもの」と解釈するか、すべての戦後処理に高句麗の意図が強く反映された事件であったのだ。

반면 『삼국사기』 의 기록에 의하면 400년을 전후해 신라와 왜의 전투가확인되지만,「광개토왕릉비』의 기록처럼 신라가 크게 불리한 전황은 아니었다.
一方『三国史記」の記録によ(依)れば、400年を前後して新羅と倭の戦闘が確認されるが、「広開土王碑」の記録のように、新羅が大きく不利な戦況はなかった。

393년에는 신라의 수도가 포위되었으나 신라군이 獨山까지 추격해 격퇴하기도 했다.
393年には新羅の首都が包囲されたが新羅軍が獨山まで追撃して撃退した。

고구려가 5만이라는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지원한 것은 철저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高句麗が5万という大軍を派遣して新羅を支援したのは、徹底的に現実的な理由だった。

「광개토왕릉비」가 전하는 광개토왕 10년의 정토는 신라 매금의 조공으로 마무리된다.

「広開土王陵碑」が伝える広開土王10年の征討は新羅寐錦の朝貢という結果をもたらしている。

이는 고구려의 전후 처분을 신라도 수긍하였음을 의미한다.
これは高句麗の前後処分を新羅も納得(首肯)したことを意味する。

결국,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왜병을 격퇴했지만,고구려에군사적 • 정치적으로 강하게 예속되고 말았다.
最後に、新羅は高句麗を介して倭兵を撃退したが、高句麗の軍事的•政治的に強く隷属されてしまった。

광개토왕 14년 (414)에는 왜가 대방 지역을 침공하였다.
広開土王14年(404)には、倭が相手の地域に侵入した。

이 때 ‘殘國과 和通하여’ 라는 문구에 주목해, 백제 • 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このとき「殘國と和通して」というフレーズ(文句)に注目し、百済•倭が連合して高句麗を攻撃したとみられる。

가-14 에 ‘連船’둥의 단어가 둥*장하고 있어 고구려가 수군을 동원하여 방어한 것 같다.
가-14に「連船」とかの言葉が登場しており、高句麗が水軍を動員して防御したようである。

광개토왕 17년 (407)의 기사는 고구려가 合戰한 대상이 등장하지 않아,후연 또는 백제로 보고 있다.
広開土王17年(407)の記事は、高句麗が合戰した対象が登場しないが、後燕または百済であるとみられる。

먼저 후연으로 보는 의견은 406년침공에 대한 역습으로 후연을 공격하였다고 본다.
まず、後燕と見る意見は406年の侵攻の逆襲として後燕を攻撃したと見ている。

또, 노획한 鎧甲이 만여 벌이고,물자 역시 헤아릴 수 없올 정도로 많았기에 광개토왕 17년 정토의 대상을 후연으로 보는 설이 있다.
また、捕獲した鎧甲が一万余にも達し、物資も計り知れないほど多いので、広開土王17年の戦闘の対象を後燕と見る説がある。

백제로 보는 의견은 전과로 얻은 사구성과 루성이 중국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광개토왕롱비」 에서 후연이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점 둥을 제시한다.
百済と見る意見は前に得られた沙溝城と婁城が中国地域で発見されていない点、「広開土王陵碑」で後燕が意図的に排除されていることなどを提示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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