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마음의 열쇠 (心の内鍵 韓国語版)

지금 이 문장을 읽어줄 고등학생 여러분을 떠올리면, 제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일 공부한다고 수고많아요! 오늘은, 붓을 멈추고 교과서를 닫고, 잠시 제 편지를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매일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다양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도, 한숨 돌릴 수 있도록 ‘ 약간 색다른 비스듬한 사고'의 단면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전문은 구조언어학입니다. 구조언어학? 들어본 적 없네!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기회입니다. 이번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학문 분야로부터, '들어본 적 없는 색다른 이야기'를 소개하오니, 조금만 참고 읽어봐주시길바라요. 지면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언어과학의 소개는 삼가야 합니다만, '인간과 사회의 왜?' 에 대해 연구하는 인문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 분야에 사회언어학 또는 기호학, 구조언어인류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회과학으로서 주로 사회구조나 조직(회사 등) 등의 연구를 하는 분야입니다. 물론, 사회구조나 조직도 인간의 행위의 결과일테니, 연구자의 관심이 어느 쪽에 더 치우쳐져 있는지에 따라, 자신의 전공을 어느 한쪽으로 자칭합니다.

저는 제가 전문가 사이에서는 구조언어학자로서 소개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평소에는'언어과학자'로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언어과학이란 명칭이 더 친숙한 명칭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구조언어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편견과 싸우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갖가지 가치판단, 즉 된장국이 맛있다든가, 썩어가는 생선의 냄새는 심하다든가, 이것이 아름답다든가, 누군가가 이상하다는 것이, 모두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취향' 즉 편견에 불과하다는 자세로 사물을 해석해가는 것입니다.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취향이란, 물론 절대적이지 않고, 가치 판단에 실증적인 근거가 수반되지는 않겠죠?. 인간의 정신의 구조를 형성하는 말과 인식체계의 구조등을 자주 논하게 되니 실체적인 접근이 매우 필요한 학문분야입니다.

<침이 더러운 이유는???>
예를 들어, 절대적으로 만인에게 '맛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음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더럽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것을 보면, 바로 '앗! 더럽다!' 라고 합니다만, 왜 우리는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인식할 수 있는지, 다소 철학적인 물음부터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 더럽다'고 불리는 것에 (절대적) 실체가 있을까요? 간단히 결론을 미리 말하면 실체는 없습니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즉, 자의적인 판단), '더러워'라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더러움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데, 왜 우리는 '더러움'이라고 느끼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마치 실체란 게 존재하는 것처럼 믿거나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렵나요? 예를 들어 볼게요. 사회인류학자 메어리 더글러스는 '더러움의 정체'에 대해 침을 예로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험해 봅시다. 먼저, 손을 깨끗이 씻습니다. 갓 씻은 깨끗한 자신의 손바닥에 침을 뱉어 보세요. ' 지금 바로 뱉어낸 자신의 침을 다시 마셔라'라고 하면 어떨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러워'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해 봅시다. 침의 성분이 순간적으로 바뀐 것도 아니고, 찰나의 순간에 공기 오염된 것도 아닐 텐데, 우리는 '더럽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방금 내뱉은 침은 각자의 입안에 직전까지 쌓여 있던 아주 신선한 침인데 말이죠.

하지만, 나온 자신의 침이 '더러워서 마실 수 없는 사람'이라도, 애인과의 키스 때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즉, 자신의 침은 더럽다고 해서 다시 마실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의 침을 맛보게되는 것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모순되지 않나요? 이 순간 우리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가 바뀌는 것입니다.

콧털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의 털이 코 안에 있을 때는 아무도 '더러워'라고 느끼지 않지만, 콧털이 자라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이면 '더러워'라고 느낄겁니다. 이때의 더러움의 정체는 뭘까요? ’길이의 차이’지요? 즉, 우리는, '더러움에 어떤 실체가 있어서 만인에게 더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프로퍼한 장소'라고 단정하고 있는 장소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더럽다'라고 자동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카락도 머리에 붙어 있을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데(오히려 예쁘다고 느끼는데), 머리카락이 떨어지면(즉, 장소를 벗어나면) '더럽다'고 느껴지고, 싫은 기분을 맛보거나 평상심으로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적당한 장소'라는 것이 문화에 따라 다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언어에 의한 <분류의 결과>차이로 생길 뿐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어떤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자동적으로 만드러져버린다>는 겁니다. 이게 개개의 인간의 차이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단정적으로 주장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 ‘모든 것(예외 없이)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있는(존재하는) 것은 말로 이루어진 구분의 차이 , 즉 '분류'뿐입니다. 어떤 상태가 더러운 상태이고, 또 어떤 상태는 깨끗하다는 식의 분류만이 존재하고 있고,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분류를 자신의 신념인냥 <무자각적으로 가져버리게 되는 약하디 약한 갈대>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말(언어)이기 때문에, 언어에 관한 관심이 인간 과학의 근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이블의 '요한복음'의 제1장 제1절도 '처음에 말이 있고, 말은 신과 함께 있고, 말은 신이었다'라고 시작합니다. ' 창세는 신의 말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BC330년경)도 말(로고스)을 절대시하는 사고방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말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고 엄청난 중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인간을 알기 위한 암호'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말과 의식의 탄생: 어깨 결림의 기원>

여기에서는, 우리의 일상 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의식은 말을 통해 생깁니다. 즉, '말이 있기 때문에 의식할 수 있고, 말이 없으면 의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어깨 결림이 심하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어깨 결림(일본에서는 단어하나입니다)의 원인은 반드시 생리적인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어깨 결림'이라는 말(개념)이 있기 때문에 어깨가 결린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어깨 결림'이라는 '말'(개념)이 없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미국인 등은 '어깨 결림'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인이 느끼는 것과 같은 어깨결림은 일너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뻐근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태생인 저는 '어깨 결림은 어떤 감각일까'라고 상상할 뿐이니 경험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 유명테레비프로그램에 조사 의뢰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도 옛날부터 어깨가 뻐근했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인이 어깨가 뻐근해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문호인 나쯔메 소우세키가 '어깨 결림'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1910년) 이후부터 어깨가 뻐근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나쯔메 소우세키는 그의 소설 '문' 속에서,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목과 어깨의 이음새의 조금 등에 다가온 국부가, 돌처럼 결리고(응고되어) 있었다. 오코메씨는 남자의 힘껏 그것을 억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소우스케의 이마에서는 땀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쌀이 만족할 정도로 힘이 나지 않았다.'

라고 표현한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소설 '문'의 발표가 메이지 43년(1910년)이기 때문에, 2015년 올해는 '어깨 결림 탄생 105주년'이 됩니다.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병의 탄생입니다. <어깨 결림>의 예를 보면, 병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발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새롭게 탄생한 병은 매거할 틈이 없을 정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에는 '홧병(분노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고, 너무 억울해서 서서히 우울증에 빠져, 이윽고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마음의 병입니다. 이것은 물론 ‘홧병'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병증화(개념화)되는 것으로, 이 말이 없는 일본인은 <홧병>으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특정 문화에만 존재하는 질병을 '문화병'(Culture bound Syndromes)이라고 합니다. 덧붙여서 '대인공포증'이라는 병명은 '일본에서 명명된 (일본 태생의) 몇 안 되는 문화병'(기시다 슈씨 지적)이라고 합니다. 필자는 '대인공포증'을 영국 유학생에게 설명하는 데 무척이나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실패했죠. 아무리 설명해도 결국 '왜 보통 사람이 무서운가'하며 이해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되돌리지만, 이렇게 말이 의식을 낳는 것입니다. ' 말이 있으면 의식할 수 있고, 말이 없으면 의식할 수 없다'는 것은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단순히 도식화하면, 100개의 말을 가지고 있으면 100개의 의식이 생기고, 10000개의 말이 있으면 10000개의 의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말의 수가 많은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양이 많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현명하다'고 평가받기 쉬울 것입니다. 요컨대, 어휘가 풍부할수록 의식하는(할 수 있는) 세계도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성장을 방해하는 TV나 휴대폰, 또는 전자등게임기의 절도 있는 사용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본직에서 '빈곤과 격차 연구'도 하고 있습니다만, 2012년, 한 시민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빈곤과 격차 문제'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패널리스트 중 한 명중에 현(한국의 도)의 복지행정에 오랜 세월 종사한 분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빈곤가정에서 자란, 비행소년들은 대부분이 진술서를 쓸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의견은, 학습장애·집중장애·저학력의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학교 현장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교원으로부터도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습 부진으로 고통받는 사람과 어휘의 빈약함에는 상당한 상관관계가 인정됩니다.

어휘가 적은 사람에게 있어서, 매일의 수업이란, '자막이 없는 외국 영화를 보고 있는' 상태와 매우 비슷하겠지요. 말(어휘)이 적으면 당연히 의식할 수 있는 세계도 좁아지기 때문에, 자막을 읽을 수도 없는 영화를 보고 있는 학생이 졸리는 것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말도 모르는데 눈을 반짝이며 집중해 보는 편이 이상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성적이 좋거나 머리가 비상한 사람은 말(언어, 어휘 숫자등)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말(언어)이 부족하면 인식범위도 좁으니 성적이 나쁘거나 머리가 나쁘다는 평가를 받는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좀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예를 들자면.

이누이트(에스키모)는 눈에 관한 말이 60종류 이상 있다고 합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자신의 조사지에 따라 100개 이상이더라, 또는 400개 이상(사피아와 워프)이더라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것은, 눈 에 관한 말을 하나밖에 가지지 않는 일본인에게는 '아무래도 똑같이밖에 보이지 않는 눈(즉 하나의 눈)’이지만, 에스키모인들에게는 눈송이의 모양이나 습도, 눈보라의 동반과 그 조합 등으로, 60개 이상의 '다른 눈'(별도 물건)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즉, 에스키모 사람들은, 눈에 관한 풍부한 어휘 때문에, 순록의 먹이가 되는 이끼가 남아 있는 곳을 새하얀 대설원 안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같은 현상이 사막의 유목민인 베두인족에게도 보입니다. 베두인은 사막과 관련된 말이 3000종류 이상 있다고 하며, 그 어휘가 풍부하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자신(부족)의 우물이 있는 장소까지 최단거리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에서 로렌스중위의 현지 안내인이 사막의 지평선의 아득한 건너편에서 일직선으로 닥아와, 안내자를 총으로 죽여버리는 장면이 나오지요? 오만샤리흐가 연기한 베두윈족장은 <자기우물>을 찾아 사막을 직선으로 이동해왔던 것입니다. 사막에 관한 수많은 말이 있기 때문에 로렌스나 일본인들에겐 똑같아 보이는(즉 보이지 아니하는) 사막에서도 그들은 조그마한 이름의 차이를 이용해서 전혀 혼동되지 않고 일직선으로 닥아온 것입니다. 마치 상세한 지도를 가지고 걸어오는 것처럼!!!

또한, 프랑스의 인류학자로 야노마미 보호 단체를 주최하고 있는 나폴레옹 샤농에 따르면, 아마존 최오지의 정글에 살고 있는 야노마미족은, 정글에 살면서 정글이라는 말을 가지지 않았고, 그 대신 나무와 풀의 대부분에 이름을 있었다고 합니다. 어휘가 풍부하기 때문에, 불과 10살 정도의 아이가 혼자서 30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머물고 있던 샤농씨에게 전언을 위해 찾아온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역시 소상한 지도를 뇌속에 가지고 다니는 셈이니 정글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거겠지요.

아래와 같은 예는 어떨까요? 인류학자인 이와타 케이지 씨가 라오스의 산악민족 마을을 찾아가, '산의 그림을 그려주세요'라고 부탁했더니, 모두가 벌레나 풀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고 합니다. 일본인이 연상하는 뾰족한 삼각형의 산을 그려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림은 그릴 수가 없었어요. 발상이 불가능했던 겁니다. 즉, '산악민족'이라고 불리는 그들에게는 SAN(산)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산에 살았던 기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는 뾰족한 산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라는 겁니다. 이런 실험은 많은 인류학자들이 전세계에서 폭넓게 행하고 있습니다만 모든 민족에게서 같은 현상이 보입니다. 말이 없으면 인식할 수가 없다는 게 구조언어학의 확고한 결론입니다.

한국의 신문메스컴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때린다><마누라를 때려 죽였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데, 그 아버지란 자는 왜 폭력을 쓸까요? 간단히 말하면 언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어는 부족하고 제마음대로는 움직여지지 않으니 안달이 나서 때리는 거죠. 즉 그 아버지란 자에게서 폭력이란 즉 언어인 겁니다. 언어가 입으로 안되니 주먹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열등감이거나, 폭력이란 언어를 그의 또 위의부친또는 가계에서 배운 것이라고 볼수 있어요.

이상의 사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과 의식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예는, 지구상에서 일일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머릿글부분에서 밝힌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인간은 자신의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언어철학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나의 한계'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언어인류학자 사피아와 그의 제자 워프는 '말이 사고를 묶는다'는 점을 역설하여 세계적인 지지를 모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말의 테두리(우리) 안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운명정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말이 없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는 거죠.
또 유메마쿠라 바쿠 씨가 그의 소설 ‘음양사’(한국의 관상감)에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저주는 이름이다'라고 했었죠. 명언입니다.

프랑스어의 mouton(양)은 영어의 sheep(양)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가치는 같지 않습니다. 프랑스어의 mouton은 양과 그 고기, 양쪽을 의미하지만, 영어의 경우는, 양(Sheep)을 도살하여 식탁에 올리면 명칭이 바뀝니다. 양고기는 mutton이 되는 것입니다. 즉, 소리에 의한 분절(말의 분류)이 다르다는 것은, '다른 가치의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어 유저에 있어서는, 양은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고기 상태에서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데>,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바뀐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왜, '분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말이란 다름 아닌 '소리의 분절'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기호학의 소쉬르는 '소리에 차이를 만들고, 사물과 연결한' 것이 '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을 일단 '분절'이라고 말해 두지만, 분절은 이항 대립적으로 태어난다고 했죠. 남자와 여자, 낮과 밤처럼 말입니다.

<말과 실체 : '여자'와 '남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에서 말한 <모든 것엔 실체가 없다>는 말을 되새겨주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여자' '남자'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하면, 여기에도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등학생 여러분! 당신들은 자신이 '여자'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죠? 이런 당연한 질문에도, 언어인류학자(사회언어인류학)의 <비스듬한>(삐딱한) 사고를 선보여 봅시다. 예를 들자면, 여고생이 '여자'로 태어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하고 말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여자'로 분류하고, 여자의 실천항목(약하고, 귀여운, 핑크 리본, 빨간 스커트 등)을 열심히 '영입한' 사람만이 비로소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와시다 세이이치는 '여자는 '여장'에 의해 여자가 된다'고 말했지만, 꽤 함축미가 있는 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장(女装)뿐만이 아닙니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주인공 스칼렛이 무도회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미라는 흑인 노예 가정부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합니다. ' 숙녀는 작은 새처럼 소식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꾸역꾸역 먹으면 안 돼요'라고.

 여자아이는, 비록 대식가일지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음식을 조금밖에 못먹어요>라는 것을 주위에 어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면 치마를 입을까, 바지로 할까? 리본을 붙일지 안 할지? 여자아이는 넘어지면 아프지 않아도 '아프다 아파!' 라고 울면서 '약한 여자'를 연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옷은 분홍색으로 할까 빨간색으로 할까, 머리카락을 묶을까 말까? 등등 열심히 ‘여장을 마치고, '여자를 연기’하여, '여자를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실천 항목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충실하게 도입한 여자'가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것이고, 남자도 '남장하고, 남자를 실천하고, 연기하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남자다운 남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의한 분류의 결과로 <'여자'와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분류가 일치하지 않으면 성동일성 장애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칸 나오토 총리의 부인이, 카메라 앞에서 우는 '전 총리(하또야마)’에 대해, '우는 남자는 남자로 인정할 수 없네요'라고 야유한 것은, 우는 행위가 다름 아닌 '남자의 실천'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이처럼 우리는, 말의 분류에 따라, 여자를 연기하고 남자를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는 철저하게 자신의 말에 얽매여, 분류에 따라,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사를 연기하고, 부부를 연기하고, 좋은 이웃을 연기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범죄를 일으켜 체포되면 '저런 훌륭한 사람이...'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 것도, 평소의 '연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면, 남자와 여자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분류(분절 결과)에 따라, (항목의 실천에 의해)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져 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세상의 모든 것이 이렇게 사고되고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말은 항상 반대의 의미를 포함한다>

말이 분절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모든 말에는 분절된 후의 나머지 부분(모체, 즉 말과는 정반대의 의미)이 전제가 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아프리카 대자연 여행'이란 투어리스트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만, 정작 아프리카에는 '자연'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지구의 폐라고 불리는 아마존 정글의 여러 부족에도, 뉴기니아와 인도네시아의 열대 우림이나 토라자 사회에도 '자연'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즉, '자연'이라는 말이 없는 사회에는 '자연'이 풍부하고, '자연'이라는 말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자연'이 없다(잃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 된 '분절'(잘라서 나눈다)이란, 새기기 전의 전경(前景)으로서의 기초(풍경)가 있는 것을 전제로, 거기서 '잘라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족 사회의 대부분은, 자연과 인간이 분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저 덤불속에는 정령이 있으니까 무섭다'라는 신앙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분리된 전경' 즉, 반대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행복'이란 뭘까요? 눈치챘어요? 맞아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행복'한 상태를 '분절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할 것입니다. ' 행복'이라는 말을 가지지 않는 사회의 사람들만이 '진정한 행복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행복'이라는 말을 가져버린 우리에게는, '행복'이란 꿈꾸는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그 사람에 비해 행복'하다라는 정도의 재량적인 판단밖에 할 수 없겠죠.' 행복'이라는 말을 가지지 않는 사회가 있냐고? 물론, 얼마든지 있습니다.

학대를 당해서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학교에 와! 모두의 학교잖아'라고 하지만, 그것은 '(괴롭힘을 당하는 너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다’는 걸 의미하고, '친구 100명 만듭시다'라는 것은, '진정한 친구는 한 명도 만들 수 없지만'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입니다. 어려울까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행복은 불행 속에, 불행은 행복 속에 있다’는 말은요? 말은 항상 반대의 의미를 겸비한다! 이거 중요합니다.

<자신을 바꾼다는 것>

자신(다른 것도 그렇지만)을 바꾸기 위해서는 언어에 의한 '분류'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말을 성장시키고, 어휘를 풍부하게 함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분류에 단단히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의 시대에 점점 중요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어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분류'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어기호학자인 가가노이 슈이치 씨의 표현을 빌리면, 말의 열쇠는 ‘안쪽에서 잠구는 열쇠(안열쇠)’이니까, 밖에서는 결코 열 수 없는 것입니다. 교원은, 말의 바다로 뛰어들지 않고, 마음의 안쪽열쇠를 굳게 닫고 있는 학생 앞에서 '열려라! 참깨!' 를 아무리 반복해서 외쳐도 문제해결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마음의 열쇠를 열고 풍부한 말의 바다로 뛰어들지, 마음의 문을 닫은 채로 지낼 지는 학생 개개인의 의지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솝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말이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는 한 마시게 할 수 없잖아요?

<대학에서 무엇을 배울까?>

대학이란 '대학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곳'이라고 이해하면, 저절로 답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고등학생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배우는 곳'이 대학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겠죠. 고등학생 여러분은 18살이나 되면, '세상의 대부분의 디자인이나 구조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어떨까요. 이런 식의 '자세히 모르면서도, 알았다는 생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요로 다케시 씨는 '바보'라고 말했습니다('바보의 벽'). 만약, 여러분이 대학 진학을 생각하고 있다면, 꼭 인문과학의 풍부한 바다에 뛰어들어 보세요.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아름다운 열대어가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단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로테스크한 생물을 대량으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인문과학은 만인이 선택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문과학은 '사람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혹은 사람이 직시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학문의 상상력'을 풀가동하여 그 실현에 이르게하는 학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문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편한 길·편한 인생'을 굳이 선택하지 않고(첫 번째 선택으로 하지 않고), 진실과 진리를 무작정 쫓는 불편한 길을 걸어가야합니다. 그런 길을 스스로 꿋꿋하게 걸을 수 있는 신념과 용기에 힘입은 사람에게 적합한 학문이야 입니다. 세속적인 성공만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과학이 세속적이지 않다고 해서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문과학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 직시로 인한 고뇌의 결과가 현실의 개선 개혁으로 이어지는 학문인 점을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인문과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인문과학이 다른 학문보다 뛰어난 것은 현실 적응력입니다. 그것은, 인문과학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면서도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막연히 공상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부동의 근거에 근거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분야입니다. 노벨 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현실 세계를 변혁해 나가기 위한 힘으로서 상상력의 역할'에 대해 논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대기업의 종합직 채용에는 '인간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인문과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합격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주요기업의 최상위층과 총수들은 결국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더라는 걸 보여준 평론가도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은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기도 하니까, 회사의 흐름에 대해서 과거와 미래를 타사의 경험과 비교해서 적절히 적응하는 능력이 있으니 <결국에는 그들이 회사를 이끌어가더라>는 겁니다.

항간에는, 인문사회과학(특히 인문과학)을 '여자애의 시집가는 학문'이라고 보는 방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인간에 관한 관심>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고 있을 것입니다. 사회도 조직도, 결국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취사선택의 결과일 테니까, 인간의 연구가 기반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문과학은, 요즘 학력 저하나 왕따 문제, 나아가 빈곤과 격차의 문제에 대해, 가장 깊고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는 학문 분야라고 믿습니다. 인생의 좋은 결과(답)을 얻고 싶다면, 좋은 답을 도출할 수 있는 정확한 질문 능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좋은 질문 능력은 인간에 관한 끝없는 애정과 관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필** 우리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모든 것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말이 있으니 실체가 있는 것처럼<생각하고 만다>는 것이죠. 머리속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데 인간이 자신의 <말의 세계>로 인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버린다는 것, 이게 아주 무서운 겁니다. 예를 들면, <의자>란게 실체적으로 <존재하는게>아니라, 여러모양으로 자른 나무를 이런저런 식으로 꾸며맞추어서 사람이 앉게 한 걸, <의자>라고 명명하니 (즉 이름지으니) , <의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버리는 것>이지, <의자>라는 실체가 있으니 세계 어딜가도 의자가 의자가 되는 게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의자란 말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전에는 <허리걸치는 것腰掛>,<등을 걸쳐앉는 곳背もたれ>등으로 말했죠. 그러다가 1867년이후에 갑자기 <서양의자> 가 들어오니 필요에 의해서 이름을 지은것(명명命名)한 겁니다. 겨우 말을 하나 만들어 대응한 거죠. 그러나 이후에 급속히 들어오니까 , 이름을 일일이 지을 수가 없었죠. 두사람이 앉는 걸 벤치, 앉는 자리에 큐션이 있는 걸 소파, 등받이가 없는 건 스툴, 조금 옆으로 누울 수 있는 걸 카우치, 팔걸이가 있는 걸 체어라고 하며 받아들였죠. 영어권에 있는 분들과 일본은 <이름붙일까 안붙일까>는 접근도가 다른 겁니다. 이름이 있으면 <다르게 느껴지고>, 이름이 없으면 또는 하나라면 모두 <의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걸 , 의심해야하니까 이해하기 어렵지만, 불교의 무의 사상에 대해 말해보죠. 불교의 <무無>란 게 기호학이나 구조언어학등에서 말하고자하는 <실체가 없다>라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절대적으로 있는게 아니라 <있다면 있고,없다면 없다> 는 것아닙니까?! <예쁜 여자>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기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니, 절대적으로 누구나가 인정해야하는 <예쁜 여자>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아프리카호텐도트족에게는 <엉덩이가 많이 튀어나온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 이고 입이 작은 여자를 <예쁘다>는 데도 있고, <양눈썹이 서로 붙어 있는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라는 카자흐스탄등의 사회도 있습니다. 즉 <아름다움>이란 게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자기주관적이고, 그전에< 말이 없으면 ,인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죠.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바로 이런 뜻이죠. <일체유심조>(모든 게 마음이 만드는 것)라고 하죠? 이런 의미에서 불교란 <매우 크나큰 깨달음을 준 사상>이라고 인정아니할 수 없죠. <무섭다면 무섭고, 안무섭다면 무섭지 않다>는 경험정도는 있겠죠? <절대적으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는 겁니다. 처음에 예로 든 <침이 더럽다>는 <판단>과 같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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