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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쇼조, 『정신사적 고찰』

... 그러므로 전후 경험의 핵심인 몰락과 밝음, 결핍과 판타지, 비참과 유머, 혼돈과 유토피아 등의 양의성이 이룬 전형적 결실 또한 바로 '수난'을 받아들인 자 안에 있었다. 전쟁 희생자로서의 사자死者, 일본제국의 억압 아래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한 식민지 사람들, 일본 국내의 부랑아, '팡팡걸'이라 불리던 창부, 그 '수난'의 체현자들 안에야말로 전후핵심적인 결정체가 존재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수난'의 모습을 그려 내 사상상思想像으로까지 끌어올린 작품이 학문적 형식으로든 예술적 형식으로든 전후 사고를 대표했고, 이것이 사람들이 얼마큼씩 분유分有하고 있던 양의적 경험에 파고들어 사람들을 계발시켰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널리 알려진 몇 가지 예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들어라 바다의 소리를』(きけわだつみの声)의 '바다'라는 말이 품은 광범한 울림은 깊은 슬픔의 바닥에서 영원한 미래로 퍼져 나가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雨の降る品川駅)은 그 어조 안에, 모든 식민지인들의 고뇌에 악수를 건네는 부드러움을 담고 있지 않나. 그리고 이시카와 준石川淳의 「잿더미 속의 예수」(焼跡のイエス)는 암시장의 추접스런 부랑아가 결핍과 비참함과 불량성을 한 몸에 짊어짐으로써 이 세상의 예수로 화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게다가 거기엔 군국주의하의 '물가통제'나 현대적으로 관리되는 '정가'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암시장의 '바자'bazar적 성격과 '카니발'적 성격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나아가 저작 시기는 이보다 약간 늦지만 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의 「성냥팔이 소녀」(マッチ売りの少女)는 밤거리의 창부가 성녀의 현세적 화신이라는 점을, 이시카와보다도 한층 더 '메르헨'적인 애정을 가지고 표출하고 있지 않나.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백치」白痴나 그 밖의 이론가, 예를 들어 하나다 기요테루花田清輝의 작품들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 속에서는 구약성서 시편에 나타나는 그 진정한 신성함의 경험이 구체성을 통해 재현돼 있다. 구약의 시편 중 보는 사람마다 몸을 피하는 추악한 노인이 실은 신성神聖의 화신이었다고 말해 주는 한 에피소드는 먼 세계의 일도 아니고 옛날 옛적의 이야기도 아니며, 실제로 우리가 눈앞에서 보고 또 우리 자신이 분유하고 있던 경험의 세계라는 점을 전후의 이 대표적 사고들이 제시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분명 비참과 결핍과 혼돈이 유토피아와 성성聖性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수난 속의 신성함(과 빛)을 캐내는 지적 매개 수단이 때로는 성서이고 때로는 안데르센의 메르헨이며, 때로는 『사기』史記이고 때로는 마르크스의 저작이며......, 즉 요약하자면 인류사적 고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류사적 고전은 교양 세계의 사물死物, 정보 세계의 부품이기를 지양함으로써 경험의 결정結晶을 읽어 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이성의 체현물로 재생된다. 여기서는 '읽는' 행위 또한 우리 이성의 경험이 되고 상상력의 경험이 되어 직접적 경험과 뒤섞이게 된다. 그런 한편 고전의 재생은 '읽는' 것을 또 다른 레벨에서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따라서 고전의 재생이라는 이 사건이야말로 고전 쪽에서 보나 우리 쪽에서 보나 전후에 '지적 레벨에서 이루어진 경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절에서 언급한 '또 하나의 전전'이라는 것도 그 대부분이 바로 이 고전의 재생이라는 지적 경험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으며 이 소생蘇生적 산출을 위한 임신기의 별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또 하나의 전전'은 그 안에 작게나마 이탈・탈주・투옥・전향 등의 형태로 '경험 그 자체'를 포함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또 하나의 전전'의 그 양쪽 부분을 겸비하고 있던 자야말로 전후 지적 경험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후지타 쇼조, 조성은 역, 『정신사적 고찰』(돌베개, 2013), 198-199
(藤田省三『精神史的考察』)

낭독 파일은 이쪽에: https://note.com/jeonghunchoi/n/n52186c4b2b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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